이전에 운영했던 티스토리 블로그에서 2019년 11월 말부터 연재했던 글들을 여기로 옮겨봅니다.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 넣는 건 아니고, 어색한 문장을 수정하거나, 이전에는 쓰지 않았던 내용을 추가하는 등의 수정을 거쳤습니다.
글의 제목은 약간 어그로성으로 돈 없이 유학을 다녀온 이야기라고 썼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집에서 도움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유학을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돈이 없어도 유학을 다녀올 수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도 '진짜 돈 한푼도 안 들이고 공짜로 유학을 다녀오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집에서 도와주지 않아도, 가지고 있는 초기자금이 많지 않아도 유학을 다녀올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 검색했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초기자금이 얼마 없는 상태에서 현지에서 스스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었습니다.
국가에 따라 그게 가능한 나라와 불가능한 나라가 있을 겁니다.
유학생의 아르바이트에 시간제한이 있고, 그걸 철저하게 지키는 나라에서는 불가능하겠죠.
이제부터 제가 2009년부터 20대 중반의 나이에 일본으로 가서 힘들게 고생했던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설명을 위해서 잠깐 경어체(존댓말)로 글을 썼지만, 이제부터 이어질 글은 평어체로 작성하겠습니다.
가장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외국은 일본이었다
요즘 학교는 역사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해방된 지 5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라서 반일감정反日感情이 지금보다 심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의 만행에 대해 초등학교 때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런 시대의 분위기 때문에 당시에는 일본 음악이나 영화도 개방이 되지 않았었다. (게임과 만화는 개방이 되어있었다)
나도 물론 역사적인 문제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끔 일본이라는 나라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고, 지금도 뉴스에서 극우들의 궤변을 들으면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런데 나는 주변 친구들에 비해서 그래도 일본에 대해서 거부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 집으로 자주 걸려왔던 일본인의 전화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부터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당시의 할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일본을 자주 왔다 갔다 하셨고, 가끔 일본에서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상대방이 '모시모시' 하면 할아버지를 바꿔줬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왜 할아버지는 자주 일본에 가시는지, 일본에서 누가 전화를 걸어오는 것인지 잘 몰랐다.
언젠가는 일본에서 오신 손님이 집으로 온 적도 있었다.
키가 큰 여성분이었는데, 할아버지의 손님이라고 하기엔 엄마뻘 정도로 젊으신 분이었다.
한국어는 못하는, 정말 100% 일본어만 사용하는 일본인을 처음 봐서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2. 일본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가 일렉기타를 시작한 이유 (feat. 엑스재팬 히데)
이전에 작성했던 '내가 일렉기타를 시작한 이유'라는 제목의 포스트에서도 썼듯이, 나는 중2 때부터 일본 밴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가사의 뜻도 모르면서 좋아하는 일본 곡들의 가사를 외워서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히라가나와 카타카나를 열심히 외워서 읽을 줄은 알게 됐다.
3. 일본어 경시대회에 입상
どんな願いならば叶えられないと言うのか?
어떠한 소원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가?
고2 때였다.
이 문장 하나로 교내 일본어 경시대회에서 3등을 했다.
일본어 능력자는 딱히 없는 우리 학교 내에서 일본어 경시대회가 열렸는데, 수업시간(우리 학교 제2외국어는 일본어였다)에 어느 정도 일본어 센스를 발휘했던 내가 참가하게 됐다.
거기서 중3 때 그냥 좋아서 외웠던 노래 가사의 저 문장을 적었다가 3등을 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그 곡은 글레이GLAY라는 밴드의 ここではない、どこかへ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라는 곡이었다.
인트로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처음으로 시작되는 가사가 위에 써놓은 가사다.
(발음은 '돈나 네가이나라바 카나에라레나이또 이우노까?')
그리고 다음 해인 3학년 때에는 또다시 교내 일본어 경시대회에 참가해서 1등을 하게 됐다.
웹상에서 우연히 읽은 글이 시작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교를 복학했는데, 한 학기만 다니고 다시 휴학을 했다.
그때가 2008년 초였다.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고 휴학을 한건 아니었다.
그냥 개인사정으로 휴학했다.
유학은 생각도 하지도 않던 때였다.
이때까지는 유학은 집에 돈이 많아야만 가는 줄로 알았었고, 마음먹으면 혼자 힘으로도 갈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가끔 들어가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어떤 웹사이트에서 어느 날 우연히, 부모님의 도움 없이 혼자 맨땅에 헤딩하듯 일본을 다녀온 어떤 사람의 경험담을 읽게 되었다.
긴 글도 아니었고, 디테일한 내용의 글도 아니었고, 재밌는 글도 아니었지만 그걸 읽고 가슴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일본어도 모르는 사람이 무작정 일본에 가서 거기서 돈도 벌면서 일본어도 배우고, 그렇게 살았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충격이었다.
저런 거, 나도 할 수 있는 건가..?
정말 혼자의 힘으로 유학이 가능한 건가..?
그 사람이 글에 적어놨던 것처럼 무조건 유학원에 상담부터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 내가 사는 광주에도 괜찮은 유학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서울에 있는 유학원들이 더 제대로 되어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서울에 있는 어느 한 유학원에서 상담을 받게 되었다.
직접 가서 상담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으면, 직접 갈 용기까지는 없어서 시도를 못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유학원은 당시에 네이트온 상담이 가능했었다.
지금도 존재하는 네이트온..
그 당시에는 네이트온이 국민 메신저였다.
첫 상담부터 거의 두세 시간을 대화했다.
상담이 끝난 후, 나는 내가 모아둔 돈으로 어떻게든 일단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후에 먼저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아빠에게도 이야기했다.
당연히 두 분 다 처음엔 깜짝 놀라며 반대를 했다.
하지만 금전적으로 지원을 해달라는 말이 아니라고, 나 혼자 알아서 가서 다 해결하겠다고 말하는데, 막을 방법이 없으셨을 거다.
유학을 가려고 휴학한 것은 아니었는데, 2009년 초에 떠나기로 계획을 잡으면서 마치 유학 준비를 위해 휴학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나의 계획은 이랬다
유학원에서 말한 초기에 필요한 비용이 있다.
비행기 왕복 티켓과 유학원에서 제공하는 집의 3달치 월세, 그리고 일본어 학교 6개월치 학비 등등..
상담을 받았을 당시의 환율로는 그게 약 700만 원 정도였다.
나는 술・담배도 안 하는 데다가 그 외 다른 과소비도 거의 없는 편이라서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돈이 조금 있었다.
여기서 몇 달만 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으면 그 돈은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어학교를 다니면서 얻게 되는 비자는 취학비자라고 하는데, 그게 2년까지 가능하단다.
일본어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엄청 빡세게 하면, 일본어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모을 수 있다.
그렇게 2년 동안 일본에 있는 음악전문학교에 갈 학비를 모아서 취학비자가 끝날 때에는 음악전문학교로 진학을 하자는 계획이었다.
음악전문학교로 진학하면 유학비자로 다시 일본에 체류할 수 있게 된다.
고생은 좀 하겠지만, 계획대로 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 당시의 도쿄의 최저시급은 900~1,000엔대였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일본과 최저시급이 거의 같아졌지만, 그 당시에는 시급이 거의 3배 정도 차이가 났었다.
출국 전
출국 날짜가 잡혔다.
2009년 1월 4일이 출국이었다.
친구들이나 휴학한 학교의 선후배 동기들에게는 "나 가면 적어도 4년 동안은 일본에 있을 거야"라고 말하며 다녔다.
유학원에서 말한 초기 비용은 아빠가 내주셨다.
도와주지 않으셨어도 갈 수는 있었지만, 뭐 덕분에 초반에 약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아빠와 나의 관계는 복잡하다.
같이 산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한참 전에 같이 살았던 기억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다.
그래서 나에게 잘해줬다거나 보통의 집에는 있을 법한 따뜻했던 아빠의 기억이라던지.. 그런 것이 없다.
항상 어색하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응원해 준 적도 한 번도 없다.
항상 반대부터 하셨다.
그러니 더더욱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아빠가 초기 비용은 내줘서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일본에 간다는 것을 말했다.
일본에 가기로 결정한 지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말했다.
할아버지는 항상 화가 많으셨다.
항상 만나기만 하면 잔소리를 하셨고, 뭘로 꾸중을 듣게 될지 몰라서 눈치만 보게 되는.. 무서운 존재였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까지 말하는 것을 미뤘던 것 같다.
역시 화를 내신다.
그런데 화를 내는 이유가 예상과 달랐다.
언제 정해진 거냐고, 왜 그걸 이제야 말하냐고 하시는 것이었다.
몇 달 전에 일본에서 친척이 왔다 갔었다는 것이다.
미리 알았으면 인사라도 시켰을 것이라며..
일본에서? 친척이??
일본에 친척이 있었어?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할아버지에게는 친형이 계셨고,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어서 존재조차도 몰랐다)
전쟁이 끝난 후에 친형은 일본에 남게 돼서, 그쪽 가족들이 지금은 다들 일본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다고 한다.
국적도 일본으로, 한국어는 전혀 못하는 채로 정말 일본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단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친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신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주소와 전화번호가 그대로인지 의심되는 옛날에 적어두신거 같은 낡은 수첩을 꺼내셔서 일본의 할머니와 고모의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를 옮겨 적어주셨다.
일본에서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거에 민감하니까 정말 필요한 때에 연락하라는 당부와 함께..
그렇게 기다리던 시간은 흘러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2009년 1월 4일 출국 당일날,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의 Rhapsody in Blue를 들었다.
정말로 가는 건가..?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꿈꿔왔던 나라로..?
이거 현실 맞나...?
달리는 버스 안에서 계속 이런 생각을 하며 갔다.
밤에 도쿄에 도착했고, 다음날인 1월 5일 새벽 같은 아침에 일어났다.
그리고 창 밖을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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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와우.. 20대 초반에... !!!...
답글삭제그때는 시급이 3배 차이였다니... 일본 가서 알바할거;ㄹ;;;
재밌게 잘 읽었습니당~~~
그때는 우리나라 최저시급이 5천 원도 안 됐을 때였고, (4천 원 정도였을까..?)
삭제그리고 2009년은 엔화 환율이 역대급으로 뛰어서 100엔에 1,600원까지 찍었던 시기였으니..
사실상 거의 4배 차이 났었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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