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등학교 밴드부의 추억, 마지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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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의 추억을 연재하는 중입니다.

이번이 4번째 글인데, 아마 마지막 글이 될 것 같네요.




마지막 글을 쓰기 전에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클릭)

중학생 때부터 일본 음악을 시작으로 Rock 음악에 빠지기 시작한 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운명처럼 그 고등학교에는 그룹사운드부(밴드부)가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뒤늦게 밴드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좋았지만, 무서운 선배들 밑에서 점점 분위기는 험악해져 갔고, 저를 포함해서 다른 동기도 선배에게 구타를 당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후배들 군기를 잡는 군대식 문화의 학교 밴드부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저는, 그나마 말이 통했던 좋아하는 선배의 탈퇴 이후로 더더욱 밴드부를 나가고 싶어 졌고, 급기야 방학 동안에는 다른 밴드의 오디션을 보고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학이 다가오게 되는데..




이전 포스트들

처음부터 읽지 않으신 분들은, 관심이 있다면 처음부터 읽어봐 주세요. 😊

설명을 위해서 잠깐 경어체(존댓말)로 글을 썼지만, 이제부터 다시 평어체로 작성하겠습니다.




YMCA 서구문화센터 소속의 새로운 밴드


오디션에 합격한 그 YMCA 서구문화센터 소속 밴드를 이제부터 Y밴드라고 칭하겠다.


내가 오디션을 봤을 때는 1차 오디션이었고, 아직 모집이 되지 않은 파트도 있어서 2차 오디션까지 진행돼서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Y밴드의 1기 멤버들은 대부분 신동영 선배 밴드의 멤버들이었고, 우리들은 2기였다.


엄밀히 따지면, 여기도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있는 '동아리'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학교 밴드부와 정말 너무 달랐다.


선배들도 친구들 같았고, 학교 밴드부와는 달리 1기와 2기가 완전히 독립된 다른 팀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연주할 곡은 우리가 선곡했다.

물론 더 경험이 많고 음악을 더 많이 아는 1기 선배들이 곡을 추천해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곡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적도 없었다.


겨울방학 동안에 Y밴드는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열심히 즐겁게 합주를 해나갔다.

학교 밴드부에서는 1학년인 내가 무서운 선배들 사이에 껴서 찍소리 못하고 연주만 했는데, 여기서는 이미 악기를 꽤 다룰 수 있는 같은 기수의 친구들과 재밌게 합주했다.





또다시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아직 방학이 끝나지 않았다.

방학이 끝나서 2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대회를 나가게 되었다.


Y밴드의 오디션이 방학 동안에 이루어졌고, 멤버들도 그때 처음 만난 친구들이었는데, 방학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대회까지 출전을 하다니.

참 속전속결로 빨랐던 것 같다.


심지어 이번 대회에서는 연주했던 곡이 총 3곡이었다.

당시에 보컬 파트를 맡은 애들만 4명인가 됐었고, 악기 멤버들은 고정이었기 때문에 단기간에 3곡을 다 외워서 연주해야 했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힘들었던 기억은 전혀 없다.

오히려 설레고 재미있었다.

팀의 분위기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이전에 학교 밴드부로 나갔던 대회는 학기 중에 개최된 대회라 저녁 시간에 경연을 했었는데, 이번 대회는 방학 중에 개최된 대회라서 낮에 경연이 이뤄졌었다.




♬ L.A. GUNS - ONE MORE REASON (1988) (작곡 Tracii Guns & Phil Lewis & Black)




대회 때 연주했던 곡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곡은 L.A. GUNSONE MORE REASON이었다.

다른 곡은, 델리스파이스Deli Spice챠우챠우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Zombie를 연주했었다.


학교 밴드부에서 연주했던 곡들과는 장르가 많이 달라졌다.

정말 내 취향에 가까운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학교 밴드부에서 연주했던 이브의 'LOVER'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야다의 '이미 슬픈 사랑'과 같은 록 발라드는 그 당시에는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었다. (지금은 좋아하지만)

학교 밴드부의 그 무서운 허기호 선배가 그런 장르를 좋아했고, 그런 곡들을 많이 불렀었기 때문에 괜히 더 그랬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전과는 달리 즐거운 마음으로 대회를 준비했기 때문이었을까?

대회에서 2등을 했다.




북구청소년수련관 개관기념 청소년 경연대회 우수상

당시 수상한 상의 사진이다.

광주의 북구에 청소년수련관이 개관하면서 개관기념 청소년 경연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밴드 멤버 모두의 이름을 써넣을 공간은 없어서 상장에는 내 이름만 쓰여있다.

그래서 이 상장은 내가 보관하고 있다.


작년 말에 강압적이고 험악한 분위기의 학교 밴드부로 나갔던 대회에서는 입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Y밴드로 출전해서 2등씩이나 해서 상도 받고..

내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이러니까 신동영 선배가 밴드부를 나갔지..'

나는 얼마 전의 신동영 선배의 입장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내가 신동영 선배와 똑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곧 엄청난 갈등이 시작될 것이 분명했다.

신동영 선배가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결국 나까지 나간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밴드부에 좋은 추억도 있긴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개학을 했고, 2학년이 되었다.


학교 밴드부에 계속 소속되어 있는 한 나는 Y밴드에서 활동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도 신동영 선배와 마찬가지로 학교 밴드부를 탈퇴해야만 했다.


학교 밴드부에서 겪었던 일들로 내 기타 실력이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시작은 여기였으니,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내가 이전 포스트에는 밴드부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들만 적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기억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 밴드부에서도 나름 재밌는 추억들이 있었다.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모이는 박람회에서 공연을 한 덕분에 팬도 생기고, 자칭 매니저라고 하며 따라다니는 여학생도 생겼다.

그 자칭 매니저 여학생이 나랑 창준이(이전 포스트 참고)에게만 수십 장의 엽서에 편지를 써서 줬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서른몇 장을 써줬는데, 창준이에게는 딱 50장을 채워서 써줘서 '뭐야, 왜 난 더 적고 애매한 숫자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 다른 학교 축제에 우리 학교 밴드부가 초대 돼서 공연을 했었는데, 그 학교의 입장에서 우리들은 다른 학교 학생들인데도 우리가 축제의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했었다.

그 때 커튼이 닫힌 무대 뒤에서 준비를 하는 동안에 사회를 맡은 학생이 '우리들이 박람회에 갔을 때 봤던 ○○고등학교 밴드 ○○을 기억하냐'는 멘트를 하면서 우리를 소개할 때부터 웅성웅성 하다가 커튼이 열리는 순간 엄청난 환호성을 들었던 기억도 있다.

정말 전혀 과장하지 않고 마치 아이돌 그룹을 맞이하는 듯한 환호성이었다.

(뭐 그만큼 우리 밴드부를 좋아했다기 보다는 그냥 학교 축제라서 기분도 좋고,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나온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무대 위에서 그런 환호성을 듣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런 나름의 좋은 추억들이 몇 개 있기는 했었지만, 자유가 없고, 강압적이고, 또 선배에게 언제 뭐 때문에 어떻게 맞을지 모르는 불안한 밴드부였다.

이전 포스도에도 썼었지만, 동기들도 다들 탈퇴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는데 그 말을 꺼냈다가는 맞을 거 같아서 말을 못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Y밴드에서 계속 활동하기 위해서는 말해야만 했다.

탈퇴하겠다고..





탈퇴하겠다고 말하기 더 힘들어졌다


밴드부를 나가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안 그래도 말하기 어려운 그것을 더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 생겼으니..

교장선생님께서 열심히 여기저기서 활동하는 밴드부를 높이 평가하시고, 합주실을 따로 만들어주신 것이었다.


방음도 안 되는.. 그냥 일반 교실이나 마찬가지였던 음악실을 벗어나서, 제대로 방음시설까지 다 갖추어진 합주실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거기다가 기타 앰프도 제대로 된 앰프들을 이미 다 구입해 놓았다.

학교 밴드부를 위해 100와트가 넘는 마샬앰프를 사주는 학교는 그 당시에 광주에서는 우리 학교뿐이지 않았을까 싶다.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나 말고도 나와 같은 기수에서 기타를 맡고 있은 창준이가 있기는 했지만, 창준이는 나보다 더 늦게 밴드부에 들어온 데다가 그전까지 기타를 친 경력이 없었다.

그리고 밴드부에서도 1학년 기타 중에서는 나만 공연에 섰었고, 창준이는 공연을 한 적도 없었다.

한마디로 밴드부 입장에서는 내가 나간다면 창준이를 또 열심히 죽어라 키워야 한다.


정말 나가겠다고 말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나가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음악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밴드부를 나가겠다고.





그 후 잠깐의 시련


내가 탈퇴를 하겠다고 말한 것 때문에 음악선생님은 심기가 아주 불편했고, 밴드부의 모두가 다 음악선생님께 혼나는 분위기가 됐었다.

그리고 음악선생님은 나의 탈퇴를 받아들이지 않으신 채 다들 합주하러 가라고 하셨다.


음악실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어디 끌려가서 죽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의외로 선배들은 그때에는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다.

본인들 때문에 내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음악선생님은 나의 탈퇴를 인정하지 않으셨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난 학교 밴드부에 그 후로 가지 않았고, 그러다가 우연히 음악선생님이라도 마주치면 엄청난 살기를 내뿜으시며 날 노려보는 음악선생님 앞에서 죄인처럼 깨갱하며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야 했다.

2학년 때부터는 음악시간이 없었는데, 그 점이 참 다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굣길에 허기호 선배를 마주쳤다.

선배는 멀리서부터 날 보더니 화난 표정으로 누가 봐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으로 나에게로 돌진해 왔다.


"퍽!!"

맞았다.

맞긴 맞았는데 다행히 얼굴은 아니었고 팔이었다.

"따라와!"

허선배는 합주실을 향했고, '아.. 죽었구나..' 생각하면서 따라갔다.


음악실에서 벗어난 새로 지어진 합주실은 반지하였고, 문도 두껍게 제대로 방음처리가 되어있었다.

문을 닫으면 합주소리도 잘 새어나가지 않을 정도인데, 사람 한 명 잡는 소리 정도는 아주 조용히 묻힐 것 같았다.

합주실을 들어가니 흡연자 선배들이 다들 각목을 하나씩 들고..

있지는 않았고, 그냥 허기호 선배가 다시 한번 나에게 물었다.

"정말 탈퇴할 거냐"라고.. 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가라고 하셨다.

생각보다 너무 쿨하고 깔끔한 헤어짐이었다.




이후로 기타 윤영배 선배가 본인의 친구에게 내 이야기를 나쁘게 해 놨는지, 윤선배 친구 한 명이 나를 마주칠 때마다 시비를 걸었다.

평소에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했던 선배였고, 원래 나를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았던 선배인데, 밴드부 탈퇴 이후로 그랬었다.


그 후로 되도록 밴드부 선배들이나 음악 선생님 눈에 띄지 않게 미어캣처럼 주위를 살피며 살았던 것 말고는 모든 것이 평화로워졌다.

동기들과도 무난하게 잘 지냈다.

특히 창준이와는 지금도 가끔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다.




창준이의 말에 의하면 내가 탈퇴한 이후로 밴드부의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도 했다.

하지만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 허기호 선배의 그 욱하는 성격이 또 한 번 터져서 1학년 신입생들이 단체로 뺨까지 맞으며 얻어터진 사건이 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그 후의 이야기


♬ 김형석 - 겨울 나그네 (2001) (작곡 김형석)




그 후로 1년 동안 Y밴드에서 많은 경험들을 했다.

어디서 어떤 공연들을 했는지 전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많은 공연들을 했고, 굉장히 넓고 큰 무대에서 수천 명 앞에서 공연을 해보기도 했었다.


당시에 현재의 SK텔레콤에서 주최하는 TTL Ting 콘서트라는 것이 있었는데, 수많은 유명 가수들이 공연을 하는 콘서트였다.

각 도시마다 TTL Ting 콘서트가 열렸는데, 그 콘서트의 오프닝 무대는 항상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10대 청소년 밴드가 공연을 한다는 콘셉트가 있었다.

운 좋게 거기에 우리 Y밴드 2기가 서게 되어서 수천 명 앞에서 공연을 했던 것이었다.




나의 10대 시절 밴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후의 이야기는 생략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의 첫 밴드였던 학교 밴드부만큼 강렬한 스토리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릿속에도 몇 가지 에피소드들만 조각조각 흩어져 있을 뿐이다.

고등학교 밴드부 이야기처럼 시간의 흐름 순서대로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그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고 도망가고 싶은 밴드부였지만, 그래도 나의 첫 밴드였고 많은 발전을 하게 해 준 밴드였다.

무서웠던 선배들이나 날 때린 선배들에게도 지금은 뭔가 안 좋은 감정은 다 사라지고, 아련하게 그래도 좋았던 점들도 떠오르기도 한다. (얼굴을 때린 건 아니라서 그렇다. 얼굴을 때린 적이 있으면 평생 양아치로 기억했을 거다.)




고등학교 밴드부를 거쳐서 Y밴드에서 활동하다가, Y밴드가 사라진 후에는 약 1년 간 공연은 못했지만, 나름 팀은 꾸려서 합주는 꾸준히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서도 밴드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그 후에는 처음으로 자작곡을 만들어 연주하는 밴드를 하게 됐고, 그렇게 20대 초반에 내 기타 연주가 담긴 첫 앨범이 발매됐다.


소속사가 있는 건 아니었고, 우리끼리 조용히 만들었던 앨범이었기 때문에 팔리지도 않는 재고를 떠안고 있을 수는 없어서 CD를 딱 100장이었나 200장이었나 그 정도만 한정으로 찍었다.

그중 한 장을 가지고 고등학교를 찾아갔었다.


그 당시 안 좋게 헤어진 음악 선생님을 찾아뵀는데, 긴장도 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갔지만, 음악 선생님은 이미 지나간 예전 일이라는 듯이 날 반갑게 맞아주셨었다.

나는 '덕분에 이렇게 아직도 기타를 치고 있다'며 내 인생 첫 앨범을 음악 선생님께 드렸다.

음악 선생님께서는 당시에 자신이 너무 못되게 굴어서 원망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앨범도 들고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하셨었다.

하지만 지금은 음악 선생님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면, 못되게 군것도 아니었고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쓸만한 현역 멤버가 자꾸 다른 밴드에서 활동하겠다며 탈퇴하는데, 골치 아프셨을 거다.


그 후로 고등학교는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마음으로는 해마다 찾아뵙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 됐다.

그리고 음악 선생님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은 건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이었는데, 가족들과 다 함께 미국으로 가셨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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